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시라카와 덴노 (문단 편집) ===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와의 화해 === 겐큐(建久) 원년(1190년) 11월 7일에 가마쿠라 막부의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1,000여 기의 군세를 거느리고 상경하여, 예전 [[헤이케]]의 본거지였던 로쿠하라에 새로 지은 저택으로 들어갔다. 도고쿠(동국, 즉 간토)의 병사들을 보려는 많은 사람들이 로쿠하라로 몰렸고, 고시라카와인도 수레를 내어 몰래 보러 왔다(《교쿠요》, 《아즈마카가미》, 《햐쿠렌쇼》 동일조). 9일에 고시라카와인과 요리토모는 인노고쇼 로쿠조도노에서 처음으로 대면했고, 두 사람 외의 다른 사람은 모두 물린 채 해가 저물 때까지 독대했다. 회담의 상세한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구간쇼》(愚管抄)에는 요리토모가 고시라카와인에게 >“법황의 일을 나 자신의 몸보다 소중히 생각합니다.” 라는 입장을 표명했고, 그 증거로서 예전 자신의 공신이었던 [[카즈사 히로츠네]](上総広常)가 조정을 경시하는 발언을 했기에 숙청했다고 밝혔다. 이날 요리토모를 곤노다이나곤(権大納言, 권대납언)으로 삼았다. 13일에 요리토모는 고시라카와인에게 사금(砂金) 800냥과 매의 깃털 두 상자, 말 100필을 바치고, 19일과 23일에는 >“대면하기를 몇 각이나 이어졌다"(御対面数刻に及ぶ), “하루 종일 어전에서 문안했다"(終日御前に候ぜしめたまふ) 라고 할 정도로 긴 시간을 회담했다(《아즈마카가미》 동일조). 24일에 고시라카와인은 가잔인 가네마사(花山院兼雅)의 우콘에노다이쇼(右近衛大将, 우근위대장)의 지위를 요리토모에게 주었다. 12월 1일의 고다이쇼 배하 의식은 고시라카와인이 수레와 의복을 조달했고, 전구(前駆) 10명 가운데 8명은 북면의 무사(北面武士)가 맡았다. 요리토모는 3일에 곤노다이나곤과 고다이쇼, 두 관직을 모두 사임했지만, 이듬해 정월에 ‘전임 고다이쇼’의 이름으로 하문을 발급하는 등, 고다이쇼에 임관되었던 사실을 활용해 자신의 권위를 높이고자 했다. 14일에 요리토모는 교토를 떠나 가마쿠라로 돌아갔다. 요리토모가 교토에 머무른 40일 동안 법황과의 대면은 총 8회였으며, 양측의 감정을 풀고 조정과 막부의 관계에 새로운 국면을 열었다. 겐큐 2년(1191년) 3월 22일에 '''<17개 조 신제>'''가 반포되었는데, 16조의 -해륙(海陸)의 도적의 방화(放火)-에 대해 >“이제부터는 분명히 전임 우콘에노다이쇼(右近衛大将, 우근위대장) 미나모토노 아손(源朝臣) 및 경기(京畿) 여러 쿠니(국)에 배속된 관사(官司)들에게 맡겨, 이들 무리를 잡아들이게 한다.”{《가마쿠라 유문》(鎌倉遺文) 523} 고 기록되어, 요리토모의 여러 쿠니의 수호권이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무가’가 ‘조정’을 수호한다는 가마쿠라 시대의 정치체제가 확립된 것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